감기인데…항문이 아프다?
얼마 전 40세의 직장인 K씨가 감기 증상을 호소하며 진료실에 들어섰다.
“몸살 감기가 좀처럼 낫질 않아요. 물론 감기 때문에 항문외과에 온 건 아니고요. 이상하게 감기가 심해질수록 점점 항문이 아파서요.”
이어서 K씨가 그 동안의 증세와 필자를 찾아오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처음 증상이 나타난 것은 삼일 전으로, 회식 자리에서 과음을 한 뒤부터 미열이 나고 머리가 아팠다. 목이 아프거나 기침이 나는 증상은 없었지만 으슬으슬 춥고 몸이 쑤시는 게 몸살인 것 같아서 약국에서 종합 감기약도 사먹고 퇴근 후엔 뜨거운 물로 사우나도 했다.
그러나 증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다음날이 되자 열이 더 높아지고 온 몸이 쑤시면서 변비 증상까지 생겼다. 할 수 없이 병원에 가서 몸살감기 주사를 맞고 처방전으로 약도 지어 먹었다. 그러나 밤새 열은 더욱 심해졌고 항문까지 욱신욱신 아프게 됐다.
“항문이 아파오니까 그냥 감기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원장님을 찾아 왔어요. 제가 무슨 병에 걸린 건가요?”
수지검사를 해보니 직장과 항문에 고름이 가득한 상태였다. 항문초음파 검사를 통해 직장항문농양과 치루를 확인한 뒤 치루근본수술을 시행했다. K씨는 이틀 동안 입원치료를 받은 후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다.
치루는 흔히 ‘항문의 맹장염(충수돌기염)’이라고 한다. 항문 안쪽에는 점액질을 분비해 배변을 돕는 항문샘이 6~12개 정도 있다. 충수돌기에 오염물질이 들어가 염증이 생기는 원리처럼 이 항문샘에 대변 속 세균이 침입하면 곪았다 터지면서 치루가 된다.
치루는 20~30대에 많으며 여자보다 남자에게 4~5배 정도 많이 발생한다. 젊을수록 항문에 땀이 많이 나며 남자들은 항문 구조상 청결 관리가 여자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은 여성보다 항문샘이 깊고 괄약근이 튼튼한 편이다. 항문샘이 깊으면 이물질이 쉽게 제거되지 않아 세균 감염 위험이 높아진다. 또한 괄약근의 압력이 높으면 항문샘의 입구가 좁아서 오물이 많이 쌓인다.
술을 좋아하거나 설사를 자주 하는 사람도 치루가 잘 생긴다. 술은 신체 면역력을 저하시켜 감염률을 높이고, 설사가 잦으면 항문샘 입구에 오물이 잔존하는 경우가 많아 세균 감염이나 염증 유발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장 결핵, 크론병 등 다른 질환이 있는 경우에도 치루가 생기기 쉽다.
치루의 초기 증상은 몸살감기와 매우 비슷하다. 염증 반응으로 온 몸에 열이 나면서 쑤시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항문 주변 통증을 미처 느끼지 못한 경우엔 K씨처럼 감기로 오해하고 엉뚱한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잘 관찰하면 배변 시 항문 안쪽이 따끔하고 항문 주위에 종기가 난 것처럼 붓는 증상을 느낄 수 있으므로 감기와 구별이 가능하다. 특히 증상이 심해지면 견디기 힘들 정도의 항문 통증이 생기고 항문이 계란 크기 정도까지 부풀어 오르기 때문에 감기와는 분명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몸살 기운이 있을 때는 ‘환절기니까 당연히 감기겠지’라고 자가진단 하기 보다는 몸 상태부터 구석구석 살펴보는 것이 좋다. 그런 다음 다른 곳에도 이상이 느껴지면 해당 병원을 찾아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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