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제대로 안 먹으면 독됩니다
서울에 사는 조모(75·여) 할머니. 7년 전 골다공증 진단을 받은 뒤 경구용 골다공증 치료제를 장기 복용해 왔다. 조 할머니는 지난해 버스를 타다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다. 가볍게 넘어졌는데도 무릎 뼈가 으스러졌다. 검사해 보니 골밀도가 약 복용 전보다 오히려 낮았다. 결국 무릎 재건수술을 받았다. 골다공증 약을 장복했다는 할머니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약 복용 뒤 위장장애가 생겨 한동안 임의로 약을 끊은 게 화근이었다.
이처럼 의사·약사의 약 복용 지시를 성실히 따르지 않으면 화를 당할 수 있다. 서울대 약대 신완균 교수는 최근 서울에서 열린 ‘일반인을 위한 복약지도 정보망 구축’ 시연회에서 “철저한 복약지도를 통해 약 부작용을 예방하면 연간 5조원의 건강보험 재정을 절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복약 지시 무시되기 일쑤=“이 약은 식후 30분에 한 번씩 드세요.” 이런 지시를 잘 따르는(‘복약 순응도가 높다’고 표현) 환자가 얼마나 될까. 선진국 국민이라도 절반에 그친다(세계보건기구 통계). ‘약을 좋아하는’ 우리 국민의 복약 순응도는 이보다 높을 것으로 예상하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고혈압약을 복용 중인 남성의 30.2%(여성 42.2%)만이 시간에 맞춰 꾸준히 약을 복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2002년 보건복지부 국민건강영양조사). 또 고혈압 환자의 47%는 1년 안에 임의로 약 복용을 중단한다.
경구용 골다공증 약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삼성서울병원 내분비내과 민용기 교수는 “미국에서 골다공증 약을 복용한 1만566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12개월간 이들이 얼마나 약을 잘 복용하고 있나를 조사했다”며 “복약 순응도는 50%대, 복용 지속도는 10%대에 불과했다”고 전했다.
◇불성실한 약 복용이 미국인의 넷째 사인=“며칠간 약 빼 먹는다고 큰일 나겠어?” 수많은 환자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피해는 엄청나다. 미국 질병통제센터(CDC)의 2002년 사망원인(추정) 보고서에 따르면 고혈압 약·고지혈증 약 등 심혈관계 약 복용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아 해마다 미국에서 12만5000명이 숨진다. 미국인 사망 원인 중 넷째다. 심장병·암·뇌졸중 다음이다. 약을 불성실하게 복용한 탓에 생명을 잃는 사람의 수가 교통사고 사망자의 세 배에 달한다. 우리나라 사인 조사에선 ‘불성실한 약 복용’이란 항목이 없다.
◇노인이 약 복용을 끊는 이유=매일 여러 종류의 약을 먹는 노인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복용하는 약의 가짓수가 늘면 약 부작용의 가능성도 커진다. 나이가 들면 약을 대사(분해)시키는 장기인 간의 능력이 젊을 때보다 떨어진다. 65세 노인의 간으로 향하는 혈류량은 20대의 40∼45%에 불과하다. 이는 간의 해독·대사 기능을 떨어뜨려 약 부작용 발생 위험을 높인다.
노인이 의사와 상담 없이 약을 끊는 첫째 이유는 약의 부작용이다. 또 장기 복용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 약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 약을 복용해도 병이 잘 낫지 않는 데 따른 회의 등이 약 복용 중단을 부추긴다.
◇고혈압 약 임의 중단은 위험=지난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럽 심장학회에선 고혈압 환자가 약 복용을 자주 까먹으면 나중엔 복용을 아예 중단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심장 마비·뇌졸중의 발생 위험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미국에서 45세 이상 여성 골다공증 환자 3만5000여 명을 조사한 연구도 약을 성실하게 복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의사의 약 복용 지시를 반만 따른 여성의 골절 위험은 약을 전혀 먹지 않은 여성보다 특별히 낫지 않았다.
아주대병원 가정의학과 박샛별 교수는 “노인 환자가 의사의 처방을 받아 복용 중인 약 가운데 임의로 중단해선 절대 안 되는 약은 당뇨병 약·고혈압 약·파킨스병 약·치매 약·골다공증 약 등”이라며 “이런 약 복용 뒤 부작용이 나타나면 주치의와 상담해 다른 약으로 대체하거나 용량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관절염약(소염·진통제)·위장약은 반드시 복용해야 하는 약이 아니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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