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주가 당신의 뇌세포를 죽인다
직장인 A씨(36)는 최근 4년 사이 가방을 세 차례, 지갑을 네 차례나 잃어버렸다. 모두 술자리 후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생긴 일이다. 좀 마셨다 싶은 날에는 어김없이 필름이 끊기고 아주 많이 마신 날 이튿날에는 지갑이나 가방이 없어져 있다.
일주일에 세 번꼴로 취할 만큼 술을 마시는 B씨(41)는 몇 년 전부터 '머리가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산다.
절대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은 이름과 단어가 혀끝에서 맴도는 경험을 일주일에도 몇 차례씩 한다. 얼마 전엔 영화 '살인의 추억'을 얘기하다 주연배우 '송강호'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단정할 순 없지만 A씨와 B씨는 지속적인 음주로 인한 뇌기능 감퇴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잦은 송년회로 피할 수 없는 술자리. 그러나 뇌 건강에는 말 그대로 '독주(毒酒)'다.
◆ 필름 끊김현상은 해마손상 때문
= 술을 많이 마셨을 때 나타나는 필름 끊김 현상은 뇌 중에서도 기억을 만드는 해마가 손상돼서 발생한다.
필름 끊김이 지속적으로 장기간 이어지면 평소에도 기억이 왔다갔다하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베르니케-코르사코프 증후군'이라고 한다. 술 때문에 머리가 나빠졌다고 느끼는 사람들 중에선 이 단계에 해당하는 사람이 많은데 '알코올성 치매' 전조 단계라고 보면 된다.
술을 많이 마신 사람 뇌 MRI를 찍어보면 뇌가 전반적으로 위축돼 있다.
최근 미국 웰즐리대학 연구팀이 33~88세 성인 1839명을 대상으로 음주습관과 뇌 용적비율 관계를 분석한 결과 음주량이 많을수록 뇌 용적이 작게 나타났다.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그룹은 뇌 용적비율이 78.6%, 일주일에 1~7잔은 78%, 14잔 이상은 77.3%였다. 단 한 잔이라도 뇌를 위축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김성윤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교수는 "100억개가 넘는 뇌세포 중에서 한 번 음주로 몇 만개쯤 죽는다고 해서 당장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지만 이것이 누적되면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 30~40대 알코올질환자 많아
= 뇌세포가 줄어든다는 것은 정신능력의 쇠퇴를 의미한다.
보건복지가족부 선정 알코올질환 전문병원인 다사랑병원 최수련 원장은 "30ㆍ40대 음주를 하는 사람 중에서 기억력과 집중력 쇠퇴 때문에 우리 병원을 찾는 사례가 많다. 나이가 같은 정상인에 비해 기억력이 떨어지고 시공간감각, 충동 조절, 언어 능력도 감퇴돼 있다"고 말했다.
이는 알코올성 치매 초기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알코올성 치매 초기에는 전두엽 기능 감소가 두드러지는데 동기 부여, 충동 억제, 주변 자극에 대한 반응 억제가 잘 안 되는 증상이다. 하고 싶은 일이 없어지고, 계획성이 없어져 일을 잘 마무리짓지 못한다. 사무실에 누가 들어오면 자기와 상관없는데도 정신을 파느라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증상 등이 나타난다.
◆ 치매환자 10% 알코올성 치매
= 알코올성 치매는 알코올 자체 독성으로 인한 뇌세포 파괴, 음주로 인한 체내 비타민 B1(티아민) 등 영양소 결핍으로 생기는 병이다. 이 단계까지 가려면 밥은 거의 먹지 않고 술만 마시는 알코올 의존증 말기가 돼야 하기 때문에 음주로 뇌 기능이 좀 둔화됐다고 해서 당장 알코올성 치매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초기 증상을 방치하고 폭음을 계속하면 위험해진다. 보통은 50대 이상 연령층에서 발병한다.
전체 치매 환자 가운데 10% 정도를 차지하는 알코올성 치매는 어떤 측면에선 노인성 치매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노인성 치매가 기억력 감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과 달리 알코올성 치매는 감정을 조절하는 전두엽 쪽에서 먼저 시작되기 때문에 화를 잘 내고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등 충동 조절이 되지 않는다.
또 날짜를 잊어버리고 방금 막 지나온 길도 기억하지 못하며,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누굴 만났는지 등에 대한 기억을 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지난 주말에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면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가서 무슨 놀이기구를 타고 무슨 음식을 먹었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지만 이는 모두 사실이 아니다. 없어진 기억력을 상상을 통해 보충하는 '작화증(作話症)'이다.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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